조선예수교장로회 고친 이력
판 #4414 AI 초안 · 2026-10-13 15:33
요약: AI 초안 (claude-opus-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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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한국 장로교는 미국 북장로교·남장로교와 호주, 캐나다에서 온 네 장로교 선교부가 함께 세웠다. 선교사들은 1893년 선교공의회를 만들어 사업을 조정했다. 선교공의회는 한국인 노회가 생길 때까지만 두는 임시 기구였다. 1901년에는 한국인 장로와 조사(助事, 선교사를 돕던 한국인 전도인)가 참여하면서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로 넓어졌다.
1907년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길선주·양전백·한석진·이기풍·서경조·송인서·방기창 7명이 첫 졸업생으로 나왔다. 같은 해 9월 17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선교사 33명과 한국인 장로 38명이 독노회를 조직했다. 독노회는 해외 선교본부에서 독립한 하나의 한국 장로교회였다. 독노회는 전국을 일곱 대리회(代理會, 노회 일을 지역별로 나누어 맡던 모임)로 나누고 이기풍을 제주 선교사로 보냈다.
전개
- 1911년 9월: 대구 남문교회에서 열린 제5회 독노회가 대리회를 노회로 올리고 이듬해 총회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 1911년 10월~1912년 2월: 전라·경기충청·경상·황해·남평안·북평안·함경의 7개 노회가 차례로 조직되었다.
- 1912년 9월 1일: 평양에서 제1회 총회가 열렸다. 장소를 경창문 안 여자성경학원으로 적은 자료와 평양신학교로 적은 자료가 함께 있다. 총대(總代, 총회에 보낸 대표)는 한국인 목사 52명, 선교사 44명, 장로 125명으로 모두 221명이었다. 초대 총회장에 언더우드(원두우), 부총회장에 길선주, 서기에 한석진이 뽑혔다. 당시 교인은 약 12만 7천 명이었다.
- 총회는 창립 기념으로 중국 산둥성 선교를 결의했고, 1913년 박태로·김영훈·사병순 목사를 보냈다. 해마다 감사주일에 해외 선교를 위해 특별히 기도하고 헌금하도록 정했다.
결과와 영향
교단 자료에 따르면 총회가 세워질 무렵 105인 사건과 토지조사사업의 여파로 교인 수가 한동안 줄었다. 1930년대 후반 일제가 신사참배를 거세게 강요하자 총회는 이를 받아들였고, 노회장들이 평양 신사에 참배하기도 했다. 참배를 거부한 선교사들이 장로회신학교를 스스로 닫자 총회는 1940년 따로 평양신학교를 세웠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일제 말기인 1943년 해산되었다.
해방 뒤 총회는 회기 번호를 이어 갔다. 1949년 4월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제35회 총회에서 이름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바꾸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분열을 거쳤지만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등 여러 장로교단이 1912년 총회를 자기 역사의 출발점으로 기념한다.
평가
- 한국 장로교회가 노회를 넘어 총회까지 갖춘 온전한 교회 조직으로 선 사건으로 평가된다. 합동 측 기독신문은 이를 한국 개신교가 독자적 전통과 자주의식을 세운 전환점으로 보았다.
- 장로회신학대학교 쪽 연구는 이 과정을 여러 나라 선교사가 협력해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운 결실로 본다.
- 창립과 함께 해외에 선교사를 보낸 일은 한국 장로교가 선교를 중심에 둔 교회로 출발했음을 보여 준다는 평가가 있다.
- 한편 초대 총회장이 선교사였고 목사 총대 96명 가운데 44명이 선교사였으므로, 선교사의 비중은 여전히 컸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를 받아들인 일은 해방 뒤 회개와 책임 논쟁을 남겼고, 장로교 분열의 한 배경으로 꼽힌다.
| 판 | 때 | 고친 사람 | 요약 | 글자 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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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14 | 2026-10-13 15:33 | AI 초안 | AI 초안 (claude-opus-5-5) | 1,668 |